시장의 대화 주제가 바뀌고 있습니다. 더 이상 기관의 암호화폐 ‘수용’ 여부가 아닌, ‘어떻게’ 자산을 편입하고 운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핵심으로 떠올랐습니다. 현물 ETF가 월가의 자본을 끌어들이는 공식 통로 역할을 했다면, 이제 시장의 더 깊은 곳에서는 기업 재무 구조 자체를 바꾸는 거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근 데이터를 들여다보니 흥미로운 패턴이 나타납니다. 기업들이 단순히 비트코인을 사서 보유하는 단계를 넘어, 솔라나(SOL)와 같은 특정 블록체인 생태계에 직접 참여하거나 토큰화된 실물자산(RWA)을 핵심 준비자산으로 채택하는 등, 암호화폐를 ‘전략적 재무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투자를 넘어선 ‘재무화(Financialization)’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신호 1: ‘디지털 자산 트레저리(DAT)’, ETF를 넘어서는 새로운 모델의 부상
최근 30일간 기업들이 축적한 솔라나(SOL)의 양은 630만 개에 달합니다. 이는 전체 유통량의 1.6%가 넘는 규모로, 이 자본 흐름의 중심에는 ‘디지털 자산 트레저리(Digital Asset Treasury, DAT)’라는 새로운 모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동적 ETF와 능동적 DAT의 결정적 차이
현물 ETF가 자산 가격을 수동적으로 추종하는 투자 수단이라면, DAT 모델을 채택한 기업들은 생태계의 적극적인 참여자로 변모합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플랫폼에서 DAT로 전환한 DeFi Development Corp(DFDV)나 Forward Industries 같은 상장 기업들은 단순히 SOL을 매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보유한 SOL을 스테이킹하여 수익을 창출하고, 자체 밸리데이터를 운영하며, 다양한 디파이 전략을 통해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토큰 보유량을 늘려나갑니다. 자산을 금고에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하게 만드는 ‘생산적인 재무자산’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주주들에게 단순히 가격 상승에 대한 노출을 넘어, 생태계 성장에 따른 추가적인 가치를 제공하는 고도화된 전략입니다.
솔라나가 선택된 이유
물론, 이러한 DAT 모델에는 구조적 과제도 존재합니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에 비해 유동성이 부족하고, 소수의 기업에 자산이 집중될 수 있다는 리스크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기관 투자자들에게 솔라나는 이미 익숙한 이름이며, 높은 처리량과 낮은 거래 비용은 디파이 전략을 실행하기에 매력적인 환경을 제공합니다. FTX 사태로 인한 부정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솔라나 생태계의 실제 활동성과 잠재력이 시장에 각인된 역설적인 효과도 나타났습니다.
신호 2: 비트코인을 넘어, 토큰화 금(XAUT)을 준비자산으로
기업 재무 전략의 진화는 보유 자산의 다각화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나스닥 상장 자산관리 회사인 Prestige Wealth가 Aurelion Treasury로 리브랜딩하며 1억 5천만 달러의 자금을 조달, 테더 골드(XAUT)를 핵심 준비자산으로 매입하기로 한 결정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구조적 변화를 시사합니다. 변동성이 큰 암호화폐 대신, 가치가 안정적인 실물자산(금)을 토큰화한 자산을 기업의 주된 예비 자산으로 삼는 첫 나스닥 상장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Aurelion의 CEO 비요른 슈미트케는 XAUT를 “진정한 디지털 금”이라 칭하며, 인플레이션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정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업들이 암호화폐 시장의 변동성 리스크를 회피하면서도, 블록체인 기술이 제공하는 효율성과 투명성의 이점을 누리려는 수요가 존재함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는 이더리움과 같은 생산적인 L1 자산에 대한 대규모 투자와도 맥을 같이합니다. BitMine Immersion Technologies가 최근 124억 달러 규모의 이더리움을 보유하며 세계 최대의 공개 이더리움 보유 기업이 된 것은, 시장이 단순한 가치 저장을 넘어 스테이킹 수익과 생태계 확장을 통한 부가 가치 창출에 주목하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신호 3: 새로운 기업 금융 모델의 글로벌 확산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디지털 자산 트레저리 모델이 북미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나의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모델’처럼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DFDV는 한국과 일본에 현지화된 DAT 설립을 돕는 ‘트레저리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각국의 세법, 통화, 투자자 기반의 차이를 고려하여 맞춤형 암호화폐 재무 전략을 수출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Metaplanet과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기존 상장 기업이 자사의 비즈니스를 암호화폐 노출을 위한 수단으로 전환하는 전략은 시장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효율적인 경로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를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의 ‘리브랜딩 꼼수’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DFDV의 CEO 조셉 오노라티는 이를 ‘실패한 기업의 구조조정’이 아닌 ‘가장 빠른 시장 진입 경로’라고 설명합니다. 암호화폐 재무 전략이 규모를 갖추게 되면, 기존 사업은 주주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재무 활동의 부차적인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업 재무 플레이북의 탄생
시장에서 포착되는 신호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기업 암호화폐 전략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자산을 매입해 대차대조표에 추가하는 시대를 지나, 기업이 직접 블록체인 생태계의 참여자가 되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 암호화폐 전략가’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디지털 자산 트레저리(DAT)는 더 이상 실험적인 모델이 아닙니다. 이는 솔라나의 사례에서 보듯 생태계의 공급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며, Aurelion의 경우처럼 전통 금융과 디지털 자산을 잇는 다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기업 재무 플레이북은 투기적인 ETF 자금 흐름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장기적인 수요 기반을 형성하며, 특정 자산의 가치 평가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