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프로토콜’ 시대의 종언: 하이퍼리퀴드가 증명한 ‘팻 앱’ 이론과 디파이의 새로운 권력 이동

시장의 오랜 믿음에 균열을 낸 11명의 팀

지난 몇 년간 크립토 시장의 투자 공식은 비교적 명확했습니다. 바로 ‘팻 프로토콜(Fat Protocol)’ 이론에 따라, 가치는 결국 이더리움이나 솔라나 같은 레이어1(L1) 프로토콜에 축적될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애플리케이션은 단지 그 위에서 잠시 머무는 임차인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11명으로 구성된 팀이 운영하는 탈중앙화 파생상품 거래소 하이퍼리퀴드(Hyperliquid)가 지난 7월 한 달간 처리한 거래량은 약 3,300억 달러에 달합니다. 이는 같은 기간 로빈후드의 전체 거래량을 뛰어넘는 수치입니다. 이 하나의 데이터는 기존의 ‘팻 프로토콜’ 가설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시장의 가치 축적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이제 가치는 L1 블록체인이 아닌, 스스로 거대한 경제 생태계를 구축한 ‘팻 앱(Fat App)’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하이퍼리퀴드의 성공은 단순한 하나의 프로젝트 약진이 아니라, 디파이 시장의 권력이 애플리케이션 레이어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신호 1: 기술적 해자, 중앙화 거래소 속도를 온체인에서 구현하다

하이퍼리퀴드의 폭발적 성장은 단순한 운이 아닙니다. 그 기저에는 기존 탈중앙화 거래소(DEX)의 한계를 극복한 독자적인 기술 아키텍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문부터 청산까지, 모든 것을 온체인에 담다

대부분의 DEX가 오프체인 오더북이나 자동화된 시장 조성자(AMM) 방식에 의존할 때, 하이퍼리퀴드는 모든 거래 과정을 자체 L1 블록체인 위에서 처리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주문 매칭, 마진 관리, 청산 등 거래소의 핵심 기능이 모두 온체인에서 투명하게 실행됩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하이퍼코어(HyperCore)와 하이퍼EVM(HyperEVM)으로 구성된 이중 체인 설계입니다. 거래 엔진 역할을 하는 하이퍼코어와 스마트 컨트랙트를 지원하는 하이퍼EVM이 하나의 합의 메커니즘 아래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중앙화 거래소(CEX)에 필적하는 속도를 구현했습니다. 실제로 하이퍼리퀴드의 평균 거래 지연 시간은 0.2초에 불과합니다.

벤처캐피탈 없이 이룬 독립성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기술적 성취가 외부 벤처캐피탈(VC) 투자 없이, 자체 자금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프로젝트가 외부 투자자의 단기적 이익 요구에서 벗어나, 오직 기술과 사용자 중심의 장기적 로드맵에 집중할 수 있었던 핵심 동력이 되었습니다. 물론, 초기 단계의 밸리데이터 중앙화와 같은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온체인에서 CEX급 성능을 구현한 것 자체만으로도 시장에 던지는 충격은 상당합니다.

신호 2: 경제적 플라이휠, 거래가 토큰 가치를 끌어올리는 구조

하이퍼리퀴드는 기술적 우위를 넘어, 모든 참여자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는 정교한 경제 모델을 설계했습니다. 이른바 ‘경제적 플라이휠’은 거래량이 많아질수록 프로토콜과 토큰의 가치가 동반 상승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모델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 HLP(Hyperliquidity Provider) 볼트: 누구나 유동성을 공급하고 거래 수수료와 손익을 공유할 수 있는 프로토콜 관리형 마켓메이킹 인프라입니다.
  • 어시스턴스 펀드(Assistance Fund): 프로토콜 수수료의 93%가 이 펀드로 유입되어, 시장에서 HYPE 토큰을 지속적으로 바이백하고 소각하는 데 사용됩니다.

결국, 사용자들이 더 많이 거래할수록 더 많은 수수료가 발생하고, 이는 HYPE 토큰의 공급량 감소와 가치 상승으로 직접 이어집니다. 상승한 토큰 가치는 다시 유동성 공급자와 트레이더에게 더 큰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이는 다시 거래량 증가를 촉진하는 강력한 피드백 루프를 형성합니다.

신호 3: 새로운 권력의 증거, 앱을 위한 인프라 경쟁이 시작되다

하이퍼리퀴드가 거대한 온체인 경제 허브로 부상하면서, 시장의 역학 관계는 흥미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L1 블록체인들이 유망한 앱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했지만, 이제는 유력 금융 인프라 기업들이 단 하나의 ‘팻 앱’ 생태계에 편입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하이퍼리퀴드의 네이티브 스테이블코인 USDH 발행권을 둘러싼 쟁탈전입니다. 현재 하이퍼리퀴드의 59억 달러 규모 준비금을 운용할 이 막대한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쟁쟁한 플레이어들이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 오픈에덴(OpenEden)
  • 비트고(BitGo)
  • 팍소스(Paxos)
  • 에테나(Ethena)
  • 프랙스(Frax)

이는 ‘팻 앱’이 단순한 애플리케이션을 넘어, 새로운 금융 인프라가 탄생하고 경쟁하는 ‘플랫폼’이 되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자본은 이제 가치가 발생하는 곳으로 직접 흘러 들어가고 있으며, 그 중심에 바로 하이퍼리퀴드와 같은 압도적인 애플리케이션이 있습니다.

결론: ‘팻 앱’의 시대, 투자의 관점이 바뀌고 있습니다

하이퍼리퀴드의 사례는 ‘팻 프로토콜’이라는 오랜 믿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막연히 L1의 성공에 베팅하던 시대는 저물고,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 모델을 갖춘 애플리케이션이 시장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팻 앱’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제 투자자들은 어떤 L1 위에 있느냐보다, 어떤 앱이 실제 사용자 트래픽과 거래량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봐야 할 것입니다. 하이퍼리퀴드의 USDH 발행권을 둘러싼 경쟁은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서막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디파이 시장의 진정한 승자는 가장 뛰어난 L1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자체 경제 생태계를 구축한 ‘팻 앱’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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