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조용한 혁명
최근 씨티은행이 2030년까지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4조 달러 규모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기존 스테이블코인의 양적 팽창을 의미하는 듯 보이지만, 데이터를 깊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집니다. 시장의 헤게모니가 단순히 어떤 스테이블코인이 더 많이 쓰이느냐의 ‘자산’ 경쟁에서, 누가 더 나은 발행 ‘인프라’를 제공하느냐의 ‘서비스’ 경쟁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암호화폐 시장의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월스트리트의 거대 은행부터 미국의 한 주(State) 정부까지, 이제 모두가 자신만의 디지털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 서비스(Stablecoin-as-a-Service)’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전쟁터에서 어떤 플레이어들이 움직이고 있으며, 이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분석해 보겠습니다.
신호 1: 월스트리트의 베팅, ‘자산’이 아닌 ‘인프라’를 향하다
시장의 가장 명확한 신호는 자본의 흐름에서 포착됩니다. 씨티그룹의 벤처 자회사인 씨티 벤처스는 최근 런던 기반의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기업 BVNK에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BVNK의 기업가치는 이미 이전 펀딩 라운드에서 7,500만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요한 점은 씨티은행이 직접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대신, 다른 기업들이 스테이블코인을 쉽게 발행하고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돕는 ‘인프라’ 기업에 베팅했다는 사실입니다.
규제 명확성이 촉발한 기관의 확신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에는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규제 법안인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가 있습니다. BVNK의 공동창업자 크리스 함세(Chris Harmse)는 규제 명확성이 확보되면서 미국 시장이 지난 18개월간 가장 빠르게 성장했으며, 씨티은행과 같은 대형 은행들이 “결제 분야의 기술적 변화에서 선두를 차지하기 위해” 관련 분야의 선도 기업에 투자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는 월스트리트가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미래를 ‘직접 발행’이 아닌 ‘인프라 제공’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삽과 곡괭이’ 전략의 귀환
결국 씨티은행의 투자는 골드러시 시대에 금을 캐는 대신 삽과 곡괭이를 팔아 돈을 번 사업가들의 전략과 맥을 같이 합니다. 어떤 스테이블코인이 최종 승자가 될지 예측하는 대신, 누가 발행하든 반드시 필요한 핵심 인프라를 장악하겠다는 계산입니다. 이는 시장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경쟁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신호 2: 새로운 발행 주체의 등장, 탈중앙화 금융부터 주 정부까지
강력한 인프라의 등장은 예상치 못한 플레이어들을 스테이블코인 발행 시장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형 암호화폐 기업의 전유물이었던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이제는 다양한 주체들의 필요에 맞춰 ‘맞춤형’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디파이 프로토콜의 자체 통화: 주피터와 이더나랩스의 JupUSD
솔라나 기반의 대표적인 탈중앙화 거래소(DEX) 주피터(Jupiter)는 이더나랩스(Ethena Labs)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자체 스테이블코인 JupUSD를 출시할 계획입니다. 이는 이더나랩스가 제공하는 ‘화이트 라벨 스테이블코인 서비스’를 활용한 사례입니다. 주피터는 이 JupUSD를 자사 선물 거래소의 증거금, 대출 풀의 유동성 자산으로 활용할 계획이며, 기존에 보유하던 약 7억 5,000만 달러 규모의 스테이블코인을 점진적으로 JupUSD로 대체할 예정입니다. 이는 디파이 프로토콜이 외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 생태계에 최적화된 통화를 직접 발행하는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정부 브랜드 디지털 달러: 노스다코타의 ‘러프라이더 코인’
더욱 놀라운 변화는 정부 기관의 참여입니다. 미국 노스다코타 주립은행은 핀테크 기업 피서브(Fiserv)와 손잡고 주 정부가 지원하는 스테이블코인 ‘러프라이더 코인(Roughrider Coin)’을 2026년 출시할 예정입니다. 이 역시 피서브가 은행들을 위해 제공하는 화이트 라벨 스테이블코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합니다. 와이오밍 주에 이어 두 번째로 주 정부가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으로, 은행 간 거래, 가맹점 결제, 국경 간 송금 등을 지원하게 됩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암호화폐를 넘어, 공공 부문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금융 인프라로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결론: ‘자산’에서 ‘플랫폼’으로, 스테이블코인 전쟁의 새로운 국면
시장에서 나타나는 신호들을 종합해 보면 결론은 명확합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핵심 경쟁력은 더 이상 누가 더 많은 유통량을 가진 ‘자산’을 보유했느냐가 아닙니다. 대신 누가 더 안정적이고 확장성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여, 다양한 주체들이 각자의 필요에 맞는 디지털 달러를 손쉽게 발행하도록 돕느냐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씨티은행의 인프라 투자, 주피터의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 노스다코타 주 정부의 도전은 모두 이러한 거대한 흐름의 일부입니다. 이는 시장이 무질서하게 파편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강하게 성숙하며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단일 통화가 지배하는 독점적 구조가 아닌, 수많은 ‘브랜드 스테이블코인’이 공존하는 다원적 생태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새로운 전쟁에서 최종 승자는 가장 큰 자산을 보유한 기업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