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항소 법원이 암호화폐 옹호 단체 ‘코인 센터(Coin Center)’가 재무부를 상대로 제기한 ‘토네이도 캐시(Tornado Cash)’ 제재 관련 소송을 기각했다. 표면적으로는 양측의 공동 신청에 따른 소송 종결이지만, 그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암호화폐 업계의 승리가 아닌, 오히려 향후 더 큰 규제 불확실성을 남긴 ‘위험한 선례’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번 소송 기각의 핵심은 ‘어떻게’ 종결되었는가에 있다. 제11순회 항소법원은 코인 센터와 미 재무부의 ‘공동 신청(joint filing)’에 따라 하급 법원 판결을 파기하고 소송을 기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양측이 법정 다툼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의미다. 코인 센터의 집행 이사 피터 반 발켄버그(Peter Van Valkenburgh)는 이번 결정에 대해 “정부가 앞으로 나아가 그들의 위험할 정도로 광범위한 제재법 해석을 방어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의 발언은 미 재무부가 자신들의 제재 권한 범위에 대한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의도적으로 회피했음을 시사한다. 사건의 발단은 2022년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이 토네이도 캐시와 관련된 다수의 지갑 주소를 제재 명단에 올리면서 시작됐다. 코인 센터는 이것이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스마트 컨트랙트 코드’를 제재한 것으로, 재무부가 법적 권한을 넘어선 행위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암호화폐 업계는 이 소송을 통해 정부가 소프트웨어 코드를 제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법적 기준이 마련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재무부는 법정에서 자신들의 논리를 방어하며 정면 대결하는 대신, 소송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실제로 재무부는 다른 관련 소송에서 토네이도 캐시를 제재 명단에서 삭제한 뒤, 소송의 실익이 없어졌다는 ‘쟁점 소멸(moot)’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번 코인 센터와의 소송 역시 법원의 최종 판결 없이 종결됨으로써, ‘코드를 제재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 미결 과제로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미 재무부는 자신들의 광범위한 제재 권한에 대한 사법적 제한을 받지 않은 채, 앞으로도 유사한 방식으로 프라이버시 강화 기술이나 탈중앙화 프로토콜을 제재할 수 있는 ‘백지 수표’를 계속 손에 쥐게 되었다. 이는 코드 개발자들에게 심각한 ‘사법 리스크’를 안겨준다. 당장 토네이도 캐시 개발자 로만 스톰(Roman Storm)은 자금 세탁 공모, 무허가 송금 사업 운영 공모 등의 혐의로 형사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번 항소 기각이 그의 재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지는 불분명하지만, 정부의 제재 행위 자체가 위법인지에 대한 판단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은 그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또 다른 개발자 알렉세이 퍼체프는 이미 네덜란드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번 사건은 미국 정부가 논란이 되는 규제 사안에 대해 사법부의 명확한 판단을 구하기보다는, 행정력을 동원해 소송을 무력화시키고 규제의 불확실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이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려는 개발자들을 위축시키고, 프라이버시와 탈중앙화라는 암호화폐의 핵심 가치를 위협하는 심각한 ‘칠링 이펙트(chilling effect)’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