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연합(EU)이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디지털 화폐 전쟁’에 돌입한 양상이다. 미국이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기존의 기축통화 패권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유럽에서는 이를 유로화의 위상과 금융 시스템 안정을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며 강력한 경계심을 표출하고 있다.
이런 기조는 단순한 기술 규제 논쟁을 넘어, 미래 디지털 금융의 주도권을 둘러싼 양대 경제권의 첨예한 지정학적 갈등으로 비화하고 있다. 최근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BOE) 총재의 발언은 이러한 갈등의 현주소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민간 은행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대해 “금융 시스템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영국이 EU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발행 움직임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을 펼쳤다. 특히 국제결제은행(BIS) 금융안정위원회(FSB)의 신임 의장이기도 한 그의 발언은 향후 국제 금융 규제 논의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견제가 강화될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유럽 규제 당국자들의 우려는 베일리 총재의 개인적 의견을 넘어선다. 소스에 따르면 다수의 EU 관계자들은 미국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유럽 금융 시스템을 교란하고, 글로벌 통화 시장에서 유로화의 입지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국경을 넘어 빠르게 유통될 경우, 사실상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Digital Dollarization)’을 가속화시켜 유럽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영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를 중심으로 한 미국은 정반대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지난 3월 백악관 디지털자산 서밋에서 “스테이블코인이 미국의 달러 패권을 연장시킬 것”이라며, 이를 통해 달러가 글로벌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미국은 민간 기업들이 미국 국채 등 안전자산을 담보로 달러 연동 스테C이블코인을 발행하도록 장려함으로써, 전 세계 암호화폐 사용자들이 자연스럽게 미국 달러 자산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이는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지지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미국 내에서 일관된 스테이블코인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사실상 민간 주도의 달러 디지털화를 통한 패권 강화 전략에 힘을 싣고 있다. 휴대폰과 암호화폐 지갑만 있으면 전 세계 누구나 미국 국채 기반의 금융 상품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 달러에 대한 글로벌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리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겠다는 계산이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결제 수단을 넘어, 21세기 디지털 경제 시대의 기축통화 지위를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국이 ‘혁신’과 ‘패권 연장’을 명분으로 공격적인 확산 정책을 펴는 가운데, 유럽은 ‘안정’과 ‘주권 수호’를 내세워 방어벽을 쌓는 형국이다. 양측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을 경우, 향후 글로벌 금융 시장은 서로 다른 규제 체계로 파편화되거나,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무역 및 금융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앞으로 펼쳐질 양대 경제권의 디지털 화폐 전략이 글로벌 금융 지형도를 어떻게 재편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