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사회의 제재 대상인 러시아 암호화폐 거래소 가란텍스(Garantex)가 사실상 ‘그리넥스(Grinex)’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가며 16억 달러(약 2조 2000억 원)가 넘는 막대한 암호화폐 자금을 거래소 네트워크를 통해 이동시키고 있다는 블록체인 분석 결과가 나왔다. 이는 제재와 단속에도 불구하고 불법 금융 활동이 교묘하게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블록체인 분석 기업 글로벌 레저(Global Ledger)에 따르면, 지난 3월 미국, 독일, 핀란드 당국의 공조로 인프라가 차단된 가란텍스가 운영 주체를 그리넥스로 이전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글로벌 레저는 5월 초까지 그리넥스와 연관된 약 1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여러 암호화폐 거래소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으며, 지속적인 자금 흐름을 관찰한 결과 5월 30일 기준으로 이 규모가 16억 6000만 달러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이는 해당 금액이 180개가 넘는 암호화폐 거래소(VASPs, 가상자산 서비스 제공업체)를 통해 유입되거나 유출된 수치이다. 글로벌 레저의 조사 책임자 유리 세로프는 “자금 규모가 엄청나며 매일 증가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심각성을 강조했다. 특히 그리넥스에서 유출되는 자금 흐름의 상당 부분이 트론(Tron) 네트워크 상의 USDT(USDt)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컴플라이언스 기업 비트레이스(Bitrace)에 따르면, 2024년 약 6490억 달러 규모의 스테이블코인 흐름이 고위험 주소에 노출되었으며, 이 중 70% 이상이 트론 네트워크를 통한 USDT 거래였다는 분석도 이러한 위험성을 뒷받침한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트래블 룰(Travel Rule) 권고에 따르면, 가상자산 서비스 제공업체는 자금을 송수신할 때 상대방 서비스 제공업체의 주요 정보 및 관련 식별 정보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글로벌 레저의 분석에 따르면, 그리넥스에서 시작된 자금 흐름 중 상당수는 중간 주소나 난독화 기법 없이 거래소로 직접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출된 거래소 중 상당수가 이러한 의심스러운 자금 흐름 분석에 대해 응답하지 않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레저는 관련 거래소 일부에 이미 정보를 통보했다고 밝혔다.
코인텔레그래프가 글로벌 주요 암호화폐 기업 6곳에 문의한 결과, 바이낸스만이 제재 대상 개인 및 단체와의 직간접적 노출을 모니터링하고 차단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입금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관련 고객에 대해 조치를 취하고 제재 관련 주소로의 자금 전송을 막는다는 설명이다. 이는 제재 대상 기업들이 새로운 이름을 내세워 활동을 이어갈 경우, 이를 효과적으로 탐지하고 차단하는 데 여전히 어려움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가란텍스는 2022년 미국 재무부, 2025년 2월에는 유럽연합의 제재 대상에 올랐다. 지난 3월에는 미국 당국이 가란텍스와 연계된 도메인 이름을 압수하고 독일 및 핀란드 당국이 서버를 압수하는 등 국제적인 공조가 이루어졌으나, 온체인 및 오프체인 데이터를 분석한 글로벌 레저는 가란텍스가 러시아 루블 기반 스테이블코인 6000만 달러 이상을 그리넥스로 이동시키는 등 그리넥스를 “완전한 후계자”로 삼았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그리넥스 관리자 중 한 명은 고객들이 가란텍스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여 그리넥스로 자금을 이전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례는 규제 당국의 단속이 특정 플랫폼의 운영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킬 수는 있지만, 불법 활동 주체들이 쉽게 재브랜딩하고 규제 차익을 활용하여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제 도입으로 유럽 내에서 USDT 등 특정 스테이블코인 거래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제재 대상 자금 흐름이 유럽 외 지역의 거래소를 경유하여 합법적인 시스템으로 유입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암호화폐 생태계 내 자금 세탁 및 불법 금융 활동을 근절하기 위한 국제적인 공조와 추적 시스템의 지속적인 발전이 시급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