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암호화폐 법안, 9시간의 표류 끝 ‘정치적 거래’로 통과… CBDC가 핵심 뇌관으로 부상

미국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계가 9시간 동안 멈춰있는 모습을 묘사한 레트로 스타일 삽화. 암호화폐와 CBDC를 상징하는 두 갈래 길이 보이며 정치적 교착 상태를 암시한다.

미국 하원이 3개의 주요 암호화폐 규제 법안을 통과시키며 산업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표결 과정에서 하원 역사상 가장 긴 9시간 이상의 교착 상태가 발생했으며, 이는 공화당 내부의 극심한 이념 대립과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수면 위로 드러난 사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단순한 법안 통과를 넘어, 이번 사태는 향후 미국 암호화폐 정책의 향방을 가늠할 핵심적인 정치적 역학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공화당 강경파의 ‘CBDC 보이콧’과 9시간의 마비

사건의 발단은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암호화폐 주간(crypto week)’으로 명명된 이번 회기에서 당 지도부가 추진하는 3개 법안 패키지(CLARITY 법안, GENIUS 법안, 반-CBDC 감시 국가 법안)의 절차 표결을 거부했다. 이들의 요구는 단 하나, 미국 내 CBDC 개발을 금지하는 조항이 패키지에 명확히 포함되거나 통과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CBDC가 정부의 과도한 금융 감시와 통제를 불러일으키는 ‘감시 국가’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강한 우려를 표명하며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버텼다.

이로 인해 법안 토론을 시작하기 위한 단순 절차 투표가 9시간 이상 열린 채로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미국 하원 역사상 가장 긴 시간 동안 진행된 표결로, 공화당이 다수당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균열로 인해 의사일정을 진행하지 못하는 촌극이 연출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신속한 암호화폐 의제 이행을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 이념 갈등이 이를 가로막은 셈이다.

‘국방수권법(NDAA)’을 활용한 극적 타결

결국 공화당 지도부는 강경파를 설득하기 위해 정치적 묘수를 꺼내 들었다. 스티브 스컬리스 하원 원내대표는 기자들에게 CBDC 금지 조항을 암호화폐 법안 패키지에서 분리하여, 매년 반드시 통과되어야 하는 ‘국방수권법(NDAA)’에 추가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NDAA는 국방 예산과 정책을 결정하는 필수 법안으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도 쉽지 않아 다양한 부가 조항을 끼워넣어 통과시키는 ‘전략적 입법 통로’로 활용되곤 한다. 이러한 ‘거래’를 통해 강경파의 요구를 수용하는 동시에, 논쟁적인 CBDC 이슈를 분리시켜 일단 암호화폐 시장 구조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 법안들을 먼저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9시간 넘게 표류하던 하원은 마침내 절차 투표를 217대 212로 통과시키고 본회의 표결을 진행할 수 있었다.

민주당의 반격 “대통령 이해충돌 방지 못해”

한편, 민주당은 이번 법안들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특히 맥신 워터스 의원은 공화당의 ‘암호화폐 주간’에 맞서 ‘반-암호화폐 부패 주간’ 기자회견을 여는 등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워터스 의원의 핵심 비판은 법안이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의 암호화폐 사업 보유를 금지하지 않아 심각한 이해충돌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그는 “공화당은 의원과 정부 관료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없도록 했지만, 대통령과 부통령은 그 금지 대상에서 교묘하게 제외했다”고 지적하며, 이는 명백한 특혜이자 부패의 소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워터스 의원은 스테이블코인 준비금의 안정성 문제를 거론하며 “일부 준비금이 현금과 단기 국채로 구성되지만, 이 법안은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예금을 허용한다”고 비판했다. 이는 금융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또 다른 금융 위기 발생 시 납세자의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결론적으로, 미국 하원의 암호화폐 법안 통과는 산업 규제의 명확성을 향한 진일보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CBDC에 대한 정치권의 깊은 불신과 여야 간의 첨예한 대립은 향후 상원에서의 논의 과정과 최종 입법까지 험로가 예상됨을 시사한다. 특히 CBDC 금지 조항이 삽입될 국방수권법은 이제 암호화폐 산업의 미래를 결정할 또 다른 핵심 전쟁터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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