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치권이 ‘암호화폐 정치 후원금’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집권 노동당의 고위 인사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암호화폐 기부금의 전면 금지를 촉구하고 나선 반면, 나이절 패라지(Nigel Farage)가 이끄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인 개혁당(Reform Party)은 이를 미래 혁신의 상징으로 내세우며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고 있어 향후 영국의 선거 자금 규제 개혁에 중대한 변수로 떠올랐다.
노동당, “외세 개입 통로” vs 개혁당, “21세기형 정치 참여”
논쟁의 불을 지핀 것은 키어 스타머 총리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팻 맥패든(Pat McFadden) 내각장관이다. 그는 지난 14일 의회에서 “암호화폐가 향후 정치 개입 음모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영국 정치에 대한 외세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암호화폐를 통한 정치 기부를 금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같은 당의 리암 번(Liam Byrne) 의원 역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정치를 깨끗하게 하려면 어두운 돈, 숨겨진 돈, 외국 돈을 뿌리 뽑아야 한다”며 “이는 암호화폐 기부금 금지를 의미한다”고 단언했다.
번 의원은 특히 이스라엘 재벌 일란 쇼르(Ilan Shor)가 암호화폐를 이용해 몰도바 선거에 개입한 사례를 언급하며, 디지털 자산이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개혁당을 정조준한 것으로 해석된다. ‘브렉시트 설계자’로 알려진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개혁당은 지난 6월, 정치권의 혁신을 강조하며 암호화폐를 통한 후원금 접수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패라지는 “암호화폐와 디지털 자산은 이제 현실”이라며, 특히 젊은 층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는 수단으로 암호화폐의 긍정적 역할을 부각시켰다.
현행법 허점과 규제 강화 논의… “투명성 확보가 관건”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법률 전문가들은 신중한 접근을 주문하고 있다. 암호화폐 전문 로펌 로젠블랫 로(Rosenblatt Law)의 파트너 톰 스필러(Tom Spiller)는 “암호화폐 기부가 법정화폐 기부보다 더 높은 위험을 초래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영국의 현행 선거법은 500파운드를 초과하는 모든 기부금에 대해 출처와 금액을 신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으며, 정당들은 기부자 신원 공개에 대한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며 기존 제도의 틀 안에서 충분히 관리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현행 제도가 완벽하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패 감시 단체 ‘스포트라이트 온 커럽션(Spotlight on Corruption)’의 수잔 홀리(Susan Hawley) 사무총장은 익명의 행위자가 합법적인 기부자에게 자금을 ‘선물’하고, 이 기부자가 다시 정당에 전달하는 방식의 우회로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암호화폐의 최종 취급자 신원만으로는 영국 민주주의를 보호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며 제도적 허점을 파고드는 새로운 형태의 자금 세탁 가능성을 경고했다. 실제로 노동당 정부는 최근 “선거 자금법이 다시 의제로 돌아왔다”고 발표하며, 기업 기부에 대한 새로운 통제와 정당의 기부자 실사 의무 강화 등을 포함한 캠페인 재정 정책 업데이트를 예고했다. 이는 암호화폐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정치 자금 흐름에 대한 투명성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미국의 사례는 영국 정치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미국에서는 이미 암호화폐 업계의 슈퍼팩(Super PAC) ‘페어셰이크(Fairshake)’가 1억 4,100만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을 축적하며 강력한 로비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이는 암호화폐가 단순히 외세 개입의 통로를 넘어, 특정 산업의 이익을 대변하며 규제 지형 자체를 바꾸려는 ‘규제 포획’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차기 총선이 2029년으로 예정된 가운데, 영국 사회는 이제 막 선거 방식에 대한 공론의 장에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암호화폐 기부금 문제가 단순히 기술적 논의를 넘어, 민주주의의 투명성과 국가 안보라는 근본적인 가치를 둘러싼 치열한 이념 대결의 장으로 비화하고 있다. 노동당의 ‘봉쇄’와 개혁당의 ‘개방’ 사이에서 영국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